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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 국가, 그 기원과 의미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은 노래, 애국가는 갑오개혁 이후 여러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후 많은 가사가 실렸고,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애국가〉를 공식 제정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러 애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부르던 애국가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것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로 채택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4절로 된 16마디 4/4박자 곡으로, 작사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윤치호, 안창호 설이 유력합니다.

     

     

    한국 국가, 그 기원과 변천사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침략이 거세지던 시기에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은 애국가가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1896년, 학부주사 이필균의 〈애국가〉를 시작으로 인천 제물포 전경퇴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북서순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회당예수교인의 〈애국가〉, 새문안교회 신도들의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학당 김종섭의 〈애국가〉, 정동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묘동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 학도들의 〈애국가〉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19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애국가들은 대부분 곡조를 알 수 없으나, 새문안교회의 〈애국가〉와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곡조가 전해집니다. 새문안교회에서는 1896년 7월 25일 고종의 생일 축하 예배에서 "높으신 상쥬님 자비론 상쥬님……" 가사의 애국가를 영국 국가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곡조에 맞춰 불렀다고 합니다. 같은 해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도들이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 가사의 애국가를 불렀는데, 이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고 합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후렴구는 이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광무개혁을 추진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국가의 필요성을 느끼고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애국가〉를 공식 제정·공포했습니다. 이 애국가는 당시 군악대 지휘자 F. 에케르트가 작곡했으며, 1904년 5월 각 학교에 배포되었습니다. 이로써 여러 애국가를 하나로 정리하려 했으나, 이후에도 많은 애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유행처럼 번진 애국가의 창작과 보급은 사회적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애국독립가류의 창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애국가 가사의 주된 내용은 자주독립, 문명개화, 부국강병, 신교육 등이었습니다.

     

    애국가의 변천사와 작사자 논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현재의 애국가는 여러 애국가 중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많이 불렸습니다. 안익태는 1936년 〈한국환상곡〉과 함께 애국가를 작곡하여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을 찾아 함께 불렀고, 상해 임시정부와 해외 교포들에게 악보를 보내 알렸습니다. 임시정부는 이 곡을 애국가로 채택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습니다.

     

    1945년 11월 12일, 김구는 애국가 악보를 국내외에 널리 보급하기 위해 한국어, 영어, 중국어 ‘한국 애국가’ 악보집을 중국에서 발간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현재의 가사와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정부 공식 행사에 사용되고 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전국적으로 불렸고, 해외에도 전파되어 실질적인 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행 애국가는 4절 가사에 16마디 4/4박자 곡입니다. 작사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55년 정부는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작사자를 밝히기 위한 연구 조사 활동과 회의를 거쳐 논의했습니다.

     

    위원회는 안창호, 윤치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등의 단독 작사설, 여러 사람의 합작설, 배재학당 애국가 개작설 등 여러 가능성에 대해 연구했으며, 안창호와 윤치호가 가장 유력한 인물로 거론되었습니다. 최종 표결에서 윤치호 11인, 확정 유보 2인으로 ‘미확정’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에도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려는 노력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국가적으로 공인되지는 않았습니다. 행정안전부 자료에는 "애국가의 노랫말은 외세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 전후 조국애, 충성심, 자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며, 여러 선각자의 손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내용이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애국가 1절~4절

    1절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작곡자에 대한 논란과 법적 지위

    안익태가 1936년 작곡한 애국가는 한때 불가리아 민요와 유사하다는 표절 시비에 휘말리면서 애국가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1965년 안익태 사후 부인 로리타 안이 저작권을 상속받아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통해 신탁 관리해오다 2005년 한국 정부에 저작재산권을 기증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비영리적 목적에 한해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규정한 절차를 거쳐 애국가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안익태가 〈친일인명사전〉(2009)에 등재되면서 애국가 존폐 논란이 일었습니다. 안익태가 일제강점기 말 일본 아악곡 선율을 차용한 〈에텐라쿠〉를 작곡하고, 나치 독일을 위한 연주회에서 공연했으며,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곡 〈만주환상곡〉을 작곡하는 등 친일, 친나치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애국가를 한국의 공식적인 국가로 지정한 법률적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정부 수립 때부터 국가로 불렸던 오랜 역사를 근거로 국가로서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따라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1984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과 이를 대체하여 2007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2010년 제정된 〈국민의례규정〉에서 국기 게양식과 강하식, 국민의례 등에서 애국가를 연주하도록 규정하여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