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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온 한국 고유의 민요입니다. 아리랑 또는 아라리와 같은 후렴구를 가진 여러 민요를 아리랑이라고 부릅니다. 정선, 밀양, 진도 아리랑을 3대 아리랑으로 꼽지만, 다양한 장단, 가락, 가사의 아리랑이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2행시 형식의 가사에 다양한 가락을 얹어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며, 때로는 시대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한국 문학과 예술사에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오는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설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아라리..."와 같은 여음(후렴이나 앞소리)을 가진 여러 민요들을 아우르는 말이에요. 아리랑이라는 이름은 이 여음에서 비롯되었답니다. 아리랑은 우리나라 곳곳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널리 불리고 있어요. 독립군아리랑, 연변아리랑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멀리 카자흐스탄에 사는 교포들의 아리랑도 전해진다고 해요.
오늘날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아리랑들을 살펴보면, 강원도 일대에서 많이 불리는 "정선아리랑", 호남 지역의 "진도아리랑", 경상남도 일대의 "밀양아리랑"을 묶어서 삼대 아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가지 아리랑은 각 지역 민요의 기본 음악 언어를 담고 있는, 지역의 전통 민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으로 알려진 아리랑은 특정인이 창의적으로 다듬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민요아리랑'으로 분류하여 삼대 '전통아리랑'과 구별합니다.
역사
지역적 분포
"정선아리랑"은 원래 "아라리"라고 불렸던 노래예요. 정선과 이웃한 영월, 평창 지역에 많이 불리는 "아라리"는 이 지역의 민요적인 특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노래로 평가받고 있답니다. 태백산맥을 따라 넓게 분포된 메나리토리권에서 "정선아라리"는 민요 "메나리"와 가장 가까운 노래로 꼽혀요. 메나리는 전통적인 민요이면서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노래랍니다.
메나리, 경상도 지역의 어산영, 호남 지방의 산아지의 연관성을 생각해보면 "정선아라리"의 전통성은 더 넓은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을 거예요. "정선아리랑"이 아리랑 중 유일하게 중요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강원도 영동과 영서 지역에서는 "정선아라리" 외에도 "강원아리랑" 또는 "자진아리"라고 불리는 다른 아리랑이 있어요. "정선아리랑"보다 훨씬 빠르고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여음을 가진 이 "자진아리"는 영서와 인제 지방의 "뗏목아리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뗏목아리랑"처럼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많이 쓰였어요. 강릉 교외 지역에서는 논이나 들에서 일할 때 부르는 노래로 쓰였고, "어루리"며 "아라성"이라는 특별한 여음을 가진 횡성, 원주, 여주, 이천 일대의 아리랑과 충주 지역의 아리랑도 기본적으로는 이 "자진아리"에 속하는, 들과 논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들이에요. 이에 비해 "정선아리랑"은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성격이 강하답니다. "정선아리랑"에는 "엮음 아라리"라는 특별한 형식의 아라리가 있어요. 이것은 가사가 일반 아라리보다 훨씬 길어서, 노래의 처음부터 중간까지 빠른 말투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노래예요. 일반 아라리와 엮음 아라리를 비교해 보면,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떠오르기도 한답니다.
호남 지역은 국악학계에서 육자배기토리권이라고 불려요. 이 지역의 민요들이 육자배기를 기본적인 음악 언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토리에 속하면서도 육자배기와는 조금 다른 음악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는 후대에 조금씩 다듬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되고 있답니다. "진도아리랑"은 호남 지역, 충청남도 일부, 경상남도 서부 지역, 제주도 등지에서 불리지만, 가장 많이 불리는 곳은 진도예요.
영남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밀양아리랑"의 경우에도 정자소리와는 음악적 특징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고 해요. "밀양아리랑"은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동북 지방에서 주로 불리고 있어서, 다른 두 지역의 아리랑에 비해 분포 지역이 좁은 편이랍니다.
역사와 변화
정선, 진도, 밀양의 3대 아리랑을 전통 민요 아리랑으로 본다면, 그중에서도 "정선아리랑"은 메나리조와 아주 가까워서 지역 민요의 음악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즉, "정선아리랑"은 지역적 특색과 전통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으며, 민요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예요. 정선 사람들은 "정선아리랑"의 기원이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믿으며,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리랑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들은 아리랑이 태백산맥에서 탄생했다고 믿고 있어요.
"정선아리랑"이 가진 민요적인 원형성과 지역 주민들의 믿음, 그리고 아리랑을 전승하는 모습들을 종합해 보면, 아리랑을 산간 지역의 '흙의 노래'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흙의 노래'는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토착성이 강하고, 지역의 일상생활을 잘 보여주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성을 지니고 있고, 지역 사람들이 널리 부르는 노래라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이 네 가지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와 지역 주민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가 바로 '흙의 노래'라고 할 수 있겠죠.
'흙의 노래'인 아리랑은 메나리나 정자소리처럼 밭, 논, 물, 산에서 부르던 '일노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여기서 '흙'은 산과 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에요. 또한, 아리랑은 산, 들, 밭, 그리고 집 안에서 부르던 '놀이노래'이기도 했답니다. '흙의 노래'인 아리랑은 슬픔, 탄식 등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노래였다고 생각돼요. 소박하고 주관적인 서정이 '흙의 노래' 아리랑의 시적인 특징이었던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신세타령이나 팔자 한탄처럼 넋두리나 푸념과 비슷한 노래였다고 볼 수 있죠. 또한, 개인 생활 주변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것도 '흙의 노래' 아리랑의 특징 중 하나였을 거예요.
하지만 아리랑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공사와 관련된 아리랑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매천야록』에 따르면 고종이 궁궐에서 아리랑을 즐겨 불렀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대원군과 고종 때 이미 서울에 아리랑이 전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답니다. 경복궁 공사를 위한 강제 노역의 고통과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가혹한 세금 징수가 아리랑에 담겨 전해지는 것을 보면, 적어도 대한제국 말기의 가혹한 정치와 사회 현상을 배경으로 아리랑이 '흙의 노래'에서 '역사와 사회의 노래'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대원군 시대를 계기로 아리랑이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고려 말 유신들의 망국의 한을 아리랑의 기원으로 보는 이야기는 아리랑이 원래부터 역사성과 사회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아리랑의 흙다움과 역사·사회다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중의 차이를 말하는 개념이에요. 즉, 아리랑이 원래 가지고 있던 역사성과 사회성이 대원군 시대처럼 역사적인 충격을 받으면서 흙다움보다 더욱 강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아리랑이 사회화하고 역사화하는 두 번째 충격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볼 수 있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이러한 아리랑의 사회화와 역사화는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이처럼 아리랑이 스스로 변화한 것은 민간에서 전해지는 전통이 역사적 변화에 적응한 결과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그것은 민간전승이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민간전승의 범위를 넘어 다른 문화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죠. 아리랑은 농어촌 전통 사회의 민간전승에서 도시 민간전승,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민간전승으로 변화했어요. 이러한 사례는 다른 민간전승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답니다. 여기서 사회 민간전승이란 당시 한국 사회 전체가 공유했던 민간전승을 의미해요. 또한, 아리랑은 사회화와 역사화를 통해 대중문화, 상업적인 소비문화,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문화까지 영역을 넓혀갔어요. '흙의 노래' 아리랑이 역사화·사회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제3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민족주의적인 문화운동, 즉 민요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답니다.
신민요아리랑의 파장
아리랑은 앞서 말씀드린 삼대 전통 아리랑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은 새로운 아리랑, 즉 신민요 아리랑이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신민요 아리랑은 어느 정도 대중가요의 성격을 갖춘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 아리랑이 새로운 시대, 즉 상업 시대와 산업 사회에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예를 들어 "아리랑 삼천리"(박시춘 작곡)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다섯 편 정도의 대중가요 아리랑부터 오늘날의 "영암아리랑"(하춘화 노래)까지 '대중가요 아리랑'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답니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전통 민요에서 신민요, 그리고 대중가요로 변화해 왔고, '가곡 아리랑'의 흐름도 존재해요. 즉, 아리랑은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노래가 되었답니다.
신민요 아리랑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경기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라는 가사로 유명하지만, 음악적인 뿌리는 대체로 "정선아라리"에서 찾을 수 있어요. 1930년대 이후 수많은 신민요 아리랑이 만들어졌을 때, "경기아리랑"은 "본조아리랑"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경기아리랑"이 신민요 아리랑의 기본이라는 의미예요. 그렇다면 "경기아리랑" 이외의 다른 신민요 아리랑들은 "별조아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이처럼 삼대 아리랑을 중심으로 다양한 아리랑이 등장하면서 시대와 장르의 차이를 넘어 우리 근대 사회에 널리, 그리고 깊이 영향을 미쳤답니다. "종두아리랑"이나 "한글아리랑"과 같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아리랑도 있었어요. "종두아리랑"은 천연두 예방 접종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한글아리랑"은 문맹 퇴치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예요.
이 두 가지 예는 아리랑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독립군아리랑"과 함께 아리랑이 민요의 영역을 넘어섰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해요. 이처럼 아리랑이 민요의 범위를 벗어나는 현상을 '아리랑의 원심력 방향 확산'이라고 한다면, 앞서 언급한 대중가요화나 가곡화도 이러한 확산의 예로 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아리랑의 탈민요화는 한 방향, 한 범주로만 설명할 수는 없어요. 상업화되는 경향, 예술(문학, 음악 등) 작품으로 편입되는 경향,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회화되는 경향 등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하지만 "독립군아리랑"의 경우, 집단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집단 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다면, 전통 민속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민속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거예요.
원심적 확산의 다양화는 민요 아리랑의 사회화 또는 역사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는 아리랑이 원형을 지향하는 전통성(구심성) 외에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는 높은 가변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해요. 이처럼 구심성과 원심성을 모두 극대화한 사례는 다른 전통 민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리랑은 다른 민요와 비교했을 때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답니다. 결국 신민요 아리랑의 등장은 아리랑이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도록 만들었어요.